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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뭉크의 절규 리뷰
    '손을 드리우고 세상에 나간다.'/명화리뷰 2020. 5. 20. 20:43

    1.
    여기에 우리가 익숙하게 아는 하나의 그림이 있다.


    이 그림은 대중문화에서 희화화 하면서, 자주 등장시키는 하나의 이미지이다. '열혈사제'라는 최근 종영한 드라마에서도 이 그림을 패러디 했었다. (ㅎㅎ '열혈사제' 드라마 팬이었다. ^^;) '스크림'이라는 공포영화에서 나오는 '연쇄살인마가 쓴 플라스틱 가면'을 '이 그림의 주인공 표정'을 본 떠서 만들었다는 말도 있다.

    이 그림을 보면 어떤 느낌이 드는가?
    이 그림의 주인공의 표정을 유심히 살펴보자. 어떤 느낌인가?
    .
    .
    .
    .
    .
    .
    .
    .
    .
    .

    어떤 사람은 이 그림의 주인공이 우스꽝스럽다고 할 것이고,
    어떤 사람은 이 그림 분위기가 우울해서 싫다고 할 것이고,
    어떤 사람은 이 그림이 지금 내 마음 상태 같아서 공감이 간다고 할 것이다.

    사람에 따라서 똑같은 그림을 다르게 느낄 수 있다.
    사람은 똑같은 장면에서도 자신이 보고자 하는 바를 찾아내어서 보기 때문이다.




    2.
    그러나,
    화가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자면, 처음에 화가가 표현하고자 했던 '느낌'이 있을 것이다. (사실.... 호기심으로 굳이 이 장면의 해설을 찾아보고 싶어졌다. 참.. 굳이 찾아볼 필요까지는 없는데 말이다. ^^;) 말하고자 하는 바는 원래 이러하였다. 뭉크는 이 작품에 굳이 이러한 글을 달아서 남겼다.

    "어느 날 저녁,

    나는 친구 두 명과 함께 길을 따라 걷고 있었다.

    한쪽에는 마을이 있고 내 아래에는 피오르드가 있었다.

    나는 피곤하고 아픈 느낌이 들었다.

    ......해가 지고 있었고 구름은 피처럼 붉은색으로 변했다.

    나는 자연을 뚫고 나오는 절규를 느꼈다.

    실제로 그 절규를 듣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진짜 피 같은 구름이 있는 이 그림을 그렸다.

    색채들이 비명을 질러댔다."

    (인터넷 검색: 위키피디아 에서 '뭉크 절규'로 검색하여 위의 내용을 참고자료로 썼음.
    https://ko.m.wikipedia.org/wiki/%EC%A0%88%EA%B7%9C )




    3.
    마치,
    우리가 이 그림을 보고 자기생각대로 느꼈듯이,
    뭉크도 노을 지는 풍경을 보고 자기생각대로 느꼈던 것이다.

    노을의 빨간색을 보면서 피를 연상하는 뭉크의 상태는 제정신은 아닌 것 처럼 보인다. 그래서 이 사람이 왜 이렇게 피폐해졌는가 또 다시 인터넷 검색으로 위키 백과사전에서 없으니 이번엔 네이버블로그에서 찾아 보았다. (참..^^; 궁금한 게 생기면 끝장을 보는 스스로 피곤한 성격이다. 인터넷 검색: 네이버블로그에서 '뭉크 일생'으로 검색하여 '세계여행을 준비중인 외계소녀 이야기 블로그'에서 객관적인 사실로서 '뭉크의 일생'에 대하여 참고 하였음.
    https://m.blog.naver.com/math7wine/221298252499 )

    뭉크는 군의관이었던 아버지와 어머니와 함께, 가난하게 살았다. 가난한 중에도 자식을 다섯 낳으셨는데, 뭉크는 둘째 였다. 뭉크 5살 때 엄마가 폐결핵 병으로 돌아가셨고, 뭉크 14살 때 엄마 역할을 해주던 바로 위의 큰누나가 같은 병으로 죽었고, 뭉크 26살에 사별 후에 계속 우울증으로 아버지 역할 하지 못하셨던 아버지께서 결국 다른 병으로 돌아가셨고, 뭉크 28살 쯤에 뭉크가 가장 사랑했던 여인이 총에 맞아 죽었고, 뭉크 33살 쯤에 뭉크 바로 아래의 남동생이 결혼 시작 6개월 경에 죽었다.

    뭉크가 사랑했던 사람들은 거의 모두 죽었다. 엄마도, 큰누나도, 아버지도, 애인도, 남동생도 모두 죽었다.

    만약, 내 일생에 내가 인간적으로 의지 했던 사람이 모두 차례로 죽는다면, 어떤 느낌일까? 그것도 한꺼번에 죽은 것도 아니고, 나의 유아기와 나의 사춘기와 나의 청년기와 나의 성인초기와 나의 성인중기에 걸쳐서 인생의 중요한 계단을 하나씩 밟을 때마다 한 사람씩 죽는다면?

    뭉크는, 자기자신에게 닥쳤던 '죽음'의 경험들을 그림일기 쓰 듯, 그림으로 그려내며 일종의 자가 미술 심리 치료를 해내며 살았다. 그래서 병약한 체질이었지만 그 시대에 80살까지 살아낼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예술의 힘이다. ^^;) 사람들은 그래서 뭉크를 쉽게, '죽음'을 표현해낸, '죽음'의 화가라고, 단정지을 수 있다.




    4.
    그러나,
    뭉크는 사실,
    '외로움'을 어느 누구보다도 정확히 표현한,
    '외로움'의 화가 이다.

    어느 누구보다도 외로움의 느낌과 본질을 꿰뚫어 표현하였다.

    뭉크의 그림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지 않다.
    서로 똑 똑 떨어져 있다.
    뭉쳐있더라도 시선을 교환하지 않는다.
    그들은 마치 산송장처럼 검은 옷을 입고 우두커니 서있다.
    홀로 잿빛 외로움에 떨며 서있다.

    중년이 넘어가면 외롭다고 한다. 불혹이라는 말이 반대로 유혹을 잘 당할 수 있는 시기이기 때문에 유혹에 넘어가지 말라고 불혹이라 이름 붙였다는 뼈있는 농담도 있다. 하지만 일생의 어느 때이건, 모든 사람은 외롭다. 외로움의 근원에는 무엇이 있을까?

    외로움의 뿌리에는,
    나자신과의 단절이 또아리를 틀고 있다.

    사람들은 텅빈 방에서 고요히 자기자신과 만나기를 두려워 한다. 그래서 끊임없이 도망친다. 핸드폰의 게임어플과 유튜브와 SNS로 도망친다. 오프라인의 술자리모임과 여행모임으로 도망친다. 심지어, 하느님께로 간다고 핑계대며 성당 사목회의 직책과 일거리로 도망치기도 한다. 그러면서, 잠시나마 나자신을 따돌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정말 무서운 사실은 무엇인 줄 아는가? 자기자신으로 부터 도망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시간은 지나가고 나자신과의 단절의 골이 깊어질 수록, 나자신은 더욱더 비루하거나 흉측한 상태가 되어, 텅빈 방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

    나와의 단절의 원인은 하느님과의 단절이며,
    나와의 단절의 결과는 이웃과의 단절이다.
    나와의 단절은 그 중간 단계에 위치하고 있다.

    하느님의 눈으로 나를 보았을 때, 나는 나를 좋아할 수 있다.

    이렇게, 비루먹어 털 빠진 오리새끼마냥 볼품 없고,
    이렇게, 온갖 흉악스러운 감정과 생각을 가득 담은 쓰레기통 같은,
    나를,
    하느님의 눈으로 바라볼 때,
    기적이 일어난다.

    미운오리새끼가 커서 백조가 되고,
    쓰레기통이 알고보니 보석상자였던 것이다.

    그리고,

    하느님의 눈으로 나를 평가했던 그 눈길로
    다른 사람을 평가하면,
    다른 사람을 불쌍하게 여길 수 있게 된다.

    내가 불쌍했듯이 너도 불쌍한 사람일 따름이구나...
    네가 가해자라고 생각했는데,
    너도 어느 누군가의 피해자 이었었구나...

    다만,
    너에게 잘못이 있다면,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고, 다시 가해자가 피해자를 양산하는...
    네가 그 악습의 순환고리를
    네 안에서 끊지 못하고 나에게 또다시 해댄 것이다.

    그리고 반대로, 나도, 어떤 면에 있어서, 어느 누군가에게, 가해자 였을 것이다.




    5.
    뭉크가 절절히 그림 속의 주인공을 통해서,
    세상을 향해 외치고 싶었던 말은,
    직설적으로 표현하자면,

    아마도 이러했을 것이다.

    "도와줘! 외로워! 나를 도와줄 사람...다...죽어버렸어.
    ...아무도 없어!
    도와줘!
    도와줘!
    도와줘! 살려줘! 제발! 제발......!
    누구 거기 없어?
    정말...
    정말...외롭단 말이야.
    정말...울고 싶은데 이제 눈물도 안나와.
    나를 좀 바라봐 줘.
    나한테 관심 좀 줘.
    나 여기 있어.
    나도 곧 죽을 것 같아.
    아니...
    정말 나도 죽을지도 몰라...
    제발,
    제발,
    날 좀 살려줘..
    제발......"

    이 '절규'는, 정확히 말해서, 사실,

    뭉크 자신의
    '상처받은 내면의 어린아이'가,

    뭉크 자신을 향해
    흐느끼며 외쳤던,

    '절규' 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절규' 보다 '더한 흐느낌'으로 범벅된 외침이 있었다면...

    이 그림을 그릴 당시,
    뭉크 가까이에서,
    뭉크를 바라보며,
    문 밖에서 문을 두드리고 계셨을(요한묵시록 3장 20절),

    아버지하느님의 '필사적으로 돕고자하는 외침'이셨을 것이다.

    아니, 뭉크는 뭉크이고, 과연,
    나는, 지금, 내 문 앞의,
    아버지하느님의 문 두드리는 소리를 들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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